오늘의 말씀

2.17(토)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보낸 서신

육종균 2018. 2. 19. 22:20

🍞오늘의 양식🍞-2
(2월 17일 토요일)

💖성경(개혁한글): 고린도후서 1:1~11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그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고린도교회가 생겨나게 된 배경을 보겠습니다.

1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행18:1-2, 개역한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바울이 만납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행18:5, 개역한글)

그리고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옵니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침례를 받더라 (행18:8, 개역한글)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행18:11, 개역한글)

이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는가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통해 알수 있듯이 고린도 교회 가운데는 많은 교리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지적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바울사도께서 서신을 보냈습니다.

이 일은 일단락 되는것처럼 보였지만, 사도바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2:4,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눈물로 이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보냅니다.
그에 대한 회신으 고린도후서 7장 6절을 보겠습니다.

6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고후7:6-7, 개역한글)

세번째 서신은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몇몇 성도들의 사도바울에 대한 오해에 대해 눈물로 사도바울이 서신을 썼고 그 서신을 받고 그 오해는 풀리고 사도바울은 다시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보냅니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위로' 입니다.

여러분은 어려움이 있을때에
어디서 위로를 얻습니까?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고후1:3, 개역한글)

우리는 누구에게 위로를 받고자 합니까?
우리는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고자 합니까, 하나님께로서 오는 위로를 받고자 합니까?

우리는 종종 다른 성도, 주변의 이웃들이 우리의 마음의 괴로움과 어려움들을 알아봐주고 그것들을 이해해주며 위로받기를 원합니다.
물론 이런것들이 잘못된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위로를 받고 성도의 사랑을 배울수 있는 기회가 될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위로가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1:4, 개역한글)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 이십니다.
사도바울이 받았던 환란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던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경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많은 어려움이 있을때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위로받기를 원하고 세상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도라면 마음이 어려울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가 커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주님을 위하여 살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주님을 섬기는것으로 인해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받는것으로 이해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얼마나 받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후1:5, 개역한글)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욱 넘치는도다"

우리의 받는 고난이 클수록 주님의 위로도 더욱 크다는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후1:6, 개역한글)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후1:8-9,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것은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아 고난을 넘기기를 바라시는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위로를 받아 고난을 통과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참으로 큰 믿음을 가진 사도이지만 그에게 고난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고난을 면제치 않았습니다.
하물며 우리들처럼 연약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어찌 면제하실수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이 고난가운데서 가졌던 마음가짐과 그 모습으로 우리가 어떻게 고난을 받아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당한 고난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수 없습니다.

3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 뿐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롬16:3-4, 개역한글)

바울 사도는 아시아에서 이 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것과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죽음이 다가왔는데 그 죽음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바울사도에게 죽을수 밖에 없는 어떤 사건이 다가왔는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성도 부부께서 목숨을 내어놓을 정도로 그 고난이 바울사도를 피해가게 하였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것처럼 바울 사도는 많은 고난가운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도 입니다.
만일 그 가운데 조금의 여유라도 있었다면 그는 혹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마음이 풍족하고 물질적인 것이 풍족하여 마음의 여유가 있을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고난을 받을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자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바울사도를 극심한 고난 가운데 집어 넣으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후1:9, 개역한글)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극심한 고난가운데 있을때 하나님을 의뢰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이 고난에서 바로 건져주십니까?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바로 구원해 주실수도 있고 구원해 주시지 않을수도 있으며 혹은 우리를 데려가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온전히 모든 것은 주님의 주권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고 위로를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 사도가 극심한 고난가운데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위로하셨던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본받고 살아가야 할것입니다.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2:19-21, 개역한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것은 우리죄로 인한 고난이 오는것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받는것을 오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For just as the sufferings of Christ flow over into our lives, so also through Christ our comfort overflows. 말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