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2.2(금)내가 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고린도후서4:7-10)

육종균 2018. 2. 11. 23:19

(2월 2일 금요일)

💖성경: 고린도후서 4:7~10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내가 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왜 주님의 제자들은 이 땅에 살면서 고난과 핍박과 환난과 순교를 당해도 이복음을 전하게 되는지를 알게 됩니다.

한번뿐인 이 땅에서 삶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귀히 쓰는 그릇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한국도자기에서 만든 '프라우나(Prouna)’라는 도자기가 중동 왕실의 입찰에서 세계적인 명품 도자기들을 제치고 5전 5승을 거두어 세계 도자기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중동 왕실에서 사용하는 도자기 입찰이 다섯 차례 있었는데
다섯 번 모두 한국도자기에서 입찰자로 선정되어 한국 도자기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금으로 이슬람을 표현한 도자기 세트를 제작하라." 몇년전 중동 어느 왕실에서 요구한 내용이었습니다.

한 공주의 결혼식 잔치에 쓰일 도자기 입찰에 독일 영국, 프랑스의 최고 명성을 자랑하는 업체들이 입찰에 참여했지만 한국 도자기의 작품에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선정 방식은 왕족들이 둘러앉아, 브랜드를 가리고 평가하는 블라인드 테스트(blind test)였는데 세계적인 명품들을 제치고 심사위원들은 이름도 생소한 한국도자기를 택한 것입니다.

한국 도자기는 지금껏
세계 유명 브랜드들에 OEM(주문자상표부착방식)으로 납품하며 안면을 익혔기에 세계 각지의 바이어들이 이제는 우리의 고유 상품명인 프라우나를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명품 도자기들과 비교해 볼 때 손색이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값싸고 질 좋고 아름다운 한국의 도자기를 선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접시·찻잔·화병 등에 많게는 3000개가 넘는 보석을 일일이 손으로 붙인, 주얼리 제품들은 비싸게는 2700만원을 호가한다고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를 질그릇에 비유한 성경의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욥 10:9)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을 마치 토기장이가 질그릇을 만들 듯이 그렇게 빗어서 만드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64:8)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빗어진 질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1947년 2월, 이스라엘 쿰란 지역 근처 광야에서 베두인 소년이 잃어버린 양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굴 안에 양이 있는 지 확인하기 위해 돌을 던졌는데, 그릇 깨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릇 깨지는 소리에 호기심을 가진 소년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게 되었는데 동굴 안에서 8개의 항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 항아리 안에는 아마포에 잘 싸인 가죽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는데.
그 소년은 항아리 안에 들어있는 것들이 얼마나 값진 보물인지를 알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의 첫 발견입니다.

사해문서는 기원전 2세기경에 베껴진 성경 사본으로서 이사야서, 시편 등이 들어 있는 가장 오래되고 획기적인 성경연구 사료입니다.
그 소년은 항아리 안에 있던 두루마리의 일부를 시장으로 가져가 골동품 상인에게 넘겼습니다. 두루마리를 처음 발견한 소년은 골동품상에 한 개당 4만원씩 받고 팔면서 횡재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히브리대학교는 이 보물을 골동품상으로부터 한 개에 25만 달러씩 주고 다시 사들이게 되었습니다. 항아리는 값싼 토기였지만 그 안에 보물이 담겨져 있었기에 엄청난 가치를 발휘한 것입니다.
이 사본들은 현재 이스라엘 국립 박물관의 성서의 전당에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질그릇 같은 인생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그릇이 있습니다.
딤후 2:20에 “큰 집에는 금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각 가정마다 다양한 그릇들이 있습니다. 그릇의 크기에 따라 큰 그릇도 있고 작은 그릇도 있습니다. 그릇의 재질에 따라 금, 은, 놋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의 그릇이 있습니다. 그릇의 용도에 따라 밥그릇, 국그릇, 냉면그릇, 반찬 그릇, 양념 그릇 등 다양한 그릇이 있습니다.
그렇듯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살아가다가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그러려니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상하리만큼 까다로운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함께 있으면 불편하고 하는 일마다 트집을 잡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도 한 그릇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사용하기에 원만한 그릇이 있는가 하면 유리그릇처럼 까다로운 그릇도 있습니다. 저희 집에 언젠가 유리 주전자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물을 끌일 때 빨리 데워지고 모양도 예뻐서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물을 끌인 다음 물기 있는 곳에 내려놓으면 여지없이 깨어지고 맙니다. 결국 사용하던 유리주전자는 그렇게 깨지고 말았습니다.

까다로운 사람은 까다로운 사람대로 사용처가 있습니다.
인생은 모두가 그릇과 같기 때문입니다. 미워하지 말고 긍휼히 여기면서 오래 참고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본문 말씀은 인생을 질그릇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그릇입니다.
사람을 물질로만 본다면 가치 없는 존재입니다. 흙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쉽게 무너지고 쉽게 깨어지기 잘하는 연약한 그릇입니다.
환란 시험 만나면 지치고 쓰러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입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 애매하게 비난의 말을 들으면 분노가 치밀고 어찌 할 줄을 모르는 나약한 그릇입니다. 가난하면 움츠러들고, 핍박을 받으면 넘어지고, 힘겨우면 쓰러져 포기하고, 죽고 싶어 하는 약한 그릇입니다.
그러기에 장애물이 크면 클수록 쉽게 깨어지고, 넘어지고, 포기하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 질그릇입니까?

대단한 건강을 가진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에 의해서도 쓸어져 죽습니다.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것 같지만
남의 말 한 마디에 기분은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합니다.

대단한 정의감을 가지고 사는 것 같지만 작은 유혹으로 얼마나 쉽게 사람들의 결심이 흔들립니까?

하나님 없는 인생은 진흙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영광을 보기 전에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모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금이나 은그릇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가치 있는 존재라고 착각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 비하여 영적으로 깨어있는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니 자신의 부정함이 드러나 보였습니다.
이사야는 탄식하며 외치기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로다.”고 했습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가 입은 옷은 대제사장의 복장입니다. 대제사장의 복장은
여러 가지 보석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옷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그에게 비춰지자 그가 입고 있던 옷이 헌 누더기와 같았습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
질그릇 같은 존재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은 비록 질그릇 인생이나 주인의 쓰임에 따라 그릇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그릇은 무엇인가 담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릇 스스로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담으므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 집집마다 가보면 장식장 안에 아주 예쁜 도자기나 그릇들을 전시 해 놓았습니다.

중세에 유럽인들은 중국에서 들여온 도자기들을 집안 장식장에 잔뜩 전시를 해 놓고 자신의 부와 고상한 취미를 자랑했다고 합니다.

장식된 그릇들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더구나 질그릇을 장식장에 전시해 놓는다면 무슨 예술적 가치나 시각적인 만족과 즐거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질그릇은 무엇인가를 담고 있느냐에 따라 그 운명과 가치가 달라집니다.

간장 된장을 담으면 양념 그릇이 됩니다. 김치를 담으면 반찬 그릇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투박하고 값싼 그릇에 온 천하에서 가장 귀한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담았습니다.

비록 그릇은 보잘 것 없고 천한 것이지만 그 안에 온 천하에서 가장 귀한 보배를 담았으니 그릇도 덩달아 그 가치와 주가가 올라가게 됩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

우리도 질그릇 같이 약하지만 가치는 겉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고 속에 무엇이 담겨져 있느냐로 좌우됩니다.
우리 속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져 있을 때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으면서도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성도들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즘 차세대 에너지로 손꼽히는 것이 핵융합발전입니다.
핵융합반응은 가벼운 두 원자핵이 결합하여 더 무거운 원자핵을 생성할 때 일어납니다. 두 원자핵이 융합할 때, 극소량의 질량이 막대한 에너지로 전환됩니다. 핵융합반응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두 원자핵이 서로의 전기적 반발력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충돌해야 합니다.

원자핵을 그렇게 빠른 속력으로 가속하기 위해 1억 도가 넘는 초고온을 사용하게 됩니다.
1억 ℃의 온도에서 플라스마를 만들어내고 이를 가두는 용기를 만드는 것이 과제로 되어 있습니다.

세계 유수의 과학자들이 핵융합로의 연구에 온 힘을 쏟는 것은 핵융합 에너지가 환경적으로 깨끗하다는 데 있습니다. 핵분열반응을 사용하는 원자력발전소에 비해 핵융합로는 오염물질이나 온실기체 또는 방사선을 거의 방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핵융합로는 또한 비교적 안전하여 핵분열 원자로에서 나타나는 노심(爐心)용해 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핵융합의 원료서 쓰이는 중수소는 바닷물 속에 풍부하게 들어 있고, 삼중수소는 실험실에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핵융합로는 인류에게 사실상 무한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자리에서 핵 융합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는 보잘 것 없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핵융합발전 에너지보다 더 강력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에게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있어서 이 에너지를
이용하면 능치 못함이 없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에너지를 제대로 활용하여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골2:2~3절에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최고의 값비싼 감추어진 보화를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단지 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창조자 하나님께서 모든 능력을 발휘하시도록 여건을 만들어 드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4절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보다 크십니다. 우리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도 우리 안에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플러스 인생을 주시는 예수께서 함께 하시므로 우리는 어떠한 일이라도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알라딘 램프가 있습니다.
램프를 비비면 큰 거인이 램프로부터 나와서 램프의 주인을 위해서
어떤 일이든지 해결해 주는 요술 램프가 알라딘 램프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랍의 전래 동화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내 질그릇 속에 능력이 심히 크신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아멘 하며 기도하면 그분은 나를 위해 일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네 질그릇 속에 위대하신 분이 함께 하고 계심을 알고 있느냐는 것이 본문말씀의 취지입니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내 안에 있는 보배는 그저 바라만 보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그런 보배가 아닙니다.
심히 큰 능력을 나를 위하여 사용하시는 파워풀한 보배입니다.

위기 극복의 능력

8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우리는 원수들로부터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 꼼짝 달싹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하는 일마다 가로막히고 실패하고 넘어지며 쓰러져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에서 '답답한 일' 은
꽉 막혀 길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낙심이란 희망이 없는 절망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답답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해결해 보려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은 문제들로 인해 답답해합니다.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다고 답답해합니다. 말씀대로 산다고 살았는데도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어 답답합니다.

수고를 했는데도 결말이 좋지 않아 답답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가져다주는 답답함은 더 큽니다.
때로는 답답함으로 인해 낙심하게도 됩니다.
그러나 답답한 일을 만났을 때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낙심치 아니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실 때 답답한 일들이 해결되어 힘을 더하여 주시리라 믿으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의 역사학자인 요세푸스는
열 두 제자의 순교일지가 기록해 놓았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못 박혀 죽었습니다.

▶️안드레는 그리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가야성에서 X자형의 십자가에 줄로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칼로 목 베임을 당했으며,

▶️요한은 에베소에서 전도하다가 핍박을 받아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졌지만 저절로 튀어 나오는 바람에 박해하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결국 그는 밧모섬으로 귀양 보내졌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 부르기아에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와 인도에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못 박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마역시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창에 맞아 죽었습니다.

▶️마태는 이디오피아에서 전도하다가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가나나인 시몬은 애굽에서 전도하고 다시 유대로 돌아와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야고보의 동생 유다는 페르시아에서 전도하다가 역시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가룟 유다 대신 열 두 제자의 반열에 오른 맛디아는 이디오피아에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순교 당하지 않은 사람은 사도요한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끔찍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어찌 보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였고 예수님의 제자 대부분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복음 전도 사역에 답답한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과 순교로 말미암아 전 세계로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망하지 않게 함

9절.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복음 전파 사역 중에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입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바울은 유대 민족에게서 버림을 당했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아 수 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 바
될 지라도 내 안에 보배인 예수그리스도를 버리지 않으면
결코 버림 바 당하지 않게 됩니다.

악한 마귀는 지금도 우리를 거꾸러트리려고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면 거꾸러트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내 안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 동력 에너지로 사용되어지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 째는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요,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헨리 워드 비쳐' 라는 사람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아침의 기도는 축복의 보화 창고 문을 여는 열쇠요, 저녁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호와 안전의 날개로 우리를 가두고 잠그는 자물쇠다!" 그랬습니다.

성경에 보면, '기도'라는 단어만 해도 무려 398번이나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강조하고 있고, 또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기도는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로 마음을 지키는 자가됩시다.

서양 속담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귀가 쓰던 도구를 다 경매 처분하는데
“이것은 팔지 않음”이라고 붙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낙심”이라는 도구였다고 합니다.

사탄은 언제나 실패하도록 미혹하는데, 낙심케 하므로 포기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보배를 질그릇 속에 모시고 사는 성도들은 결코 낙심이라는 올무에 걸려 허우적거리지 않습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37:24).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산다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예수 죽인 것"이라고 번역된 말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의 죄'를 나누어 가진다는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닙니다.
이 말은 '예수의 죽으심'이라고 번역해야 맞습니다.
즉 복음을 위하여 충성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예수와 죽어야 합니다.

로마서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예배는 곧 내가 죽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물들이 죽지 않고 드려지는 것을 보았습니까?

내 죄가 죽어지는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 열납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함과 같이 내가 죽어야 의롭게 되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역사합니다.

내가 죽어야 기도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능력의 심히 큰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조금도 위축된 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어디 가서든 당당하십시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내 안에 있으며 보배중의 보배가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