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에니어그램(ENNEAGRAM)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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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에니어그램(ENNEAGRAM)의 본질
1.에니어그램이란?
가.에니어그램이란?(용어)
(1) 에니어그램은 에네아스(Enneas;아홉을 의미) + 그라모스(Grammos; 무게, 그림, 점)라는 희랍어에서 유래되었다.
(2) 에니어그램의 기원 및 현대의 에니어그램
에니어그램은 고대 근동 지방(아프가니스탄)에서 약 2500년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대략 10세기를 전후해서 이슬람교 신비주의 수도승인 수피파에 의해서 구전으로 전해져왔다고 한다. 그들은 에니어그램이 잘못 쓰이게 될 경우의 문제를 인식하여 스승이 한 두 사람의 제자에게만 전수함으로써 비장(秘藏)되어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서구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소련 모스크바 서클(Moskva circle)의 정신적 지도자 구르지예프(George Ivanovich Gurdjieff 1872 - 1949)가 에니어그램의 상징을 만나게 되면서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고, 그것이 미국과 유럽 쪽으로 전파되었다.
현재의 에니어그램에는 “오스카 이차조”(Oscar Icazo)와 “클라오디오 나란조”(Claudio Naranzo)에 의해 현대 심리학이 깊이 가미되었다. 오스카 이차조는 에니어그램과 성격유형을 결합하였고, 클라우디오 나란조는 성격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나누고 그 유형의 특정한 느낌을 공유하는 방법으로 에니어그램을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돈 리차드 리소”(Don Richard Riso)는 각 유형의 발전 수준(Level of Development)을 밝혀내어 에니어그램의 성격유형론적 내용을 심화시켰다. 그밖에 헬렌 팔머는 에니어그램을 기업 등의 인사관리에 응용 접목시켜 더욱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현재 에니어그램은 미국에서 가장 많이 보급되어 많은 사람들이 생활이나 업무수행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제너럴모터스, AT & T를 비롯한 많은 대기업들이 에니어그램을 활용하고 있으며, 1991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국제워크샵이 개최된 이래 2000년에는 에니어그램 세계 대회가 열렸다. 또한 에니어그램은 상담과 종교적(기독교)인 영성 지도, 세미나, 및 기업의 인사관리 등에서 많이 보급, 활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나.에니어그램의 목적(에니어그램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
에니어그램은 내면의 성향(집착)을 알아채서 그것으로부터 놓여 나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인지를 알도록 도와준다.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가운데, 삶의 통찰과 통합이 이뤄지면서 우리는 새롭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번호를 찾아가는 과정은 내면의 집착을 알아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고정된 자신의 성향(집착)을 알아채면서 성격으로부터 의식이 분리되고 확장되어 가는데, 이는 자신의 성격적 틀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타인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아픔을 주었는지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이를 통해 자만과 열등감에 가득 찼던 자신을 진정으로 참회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비로소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이완되고 타인에게 관대하고 유연해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에니어그램을 통해 우리가 하고자 하는 1차적인 목적이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삶에 집착한다. 그러한 근본적인 욕망을 실현하는데 모두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결을 시도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집착의 의미이다. 나는 옳고 타인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서로 동기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하면 현실을 가감 없이 수용하게 된다. 나 자신의 집착으로 인한 오류와 타인의 오류에 대해 비로소 관대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집착에 머물기 위해 성격유형을 찾는 것이 아니다. 집착은 한 生을 통해 이뤄내야 할 개인의 소명(召命)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소명과 집착은 빛과 어두움의 관계이다. 집착에서 벗어날 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삶의 빛(소명)이 드러난다. 집착을 극복하느냐, 집착에 고착되느냐는 전적으로 각자의 노력과 의지에 달려있다. 에니어그램은 이러한 우리의 노력에 훌륭한 조력자 역할을 할뿐이다.
다.내면집착에 대하여
(1) 집착이란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크게 아홉 가지(평화, 완전함, 사랑, 진실, 창조, 지혜, 신뢰, 행복, 순수성)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가치는 집착의 형태로 우리 안에 내재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평화」란 우리들이 추구하는 가치이다. 진정한 평화는 서로가 만족하면서 크고 작은 갈등을 조정을 통해 화해된 균형 잡힌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평화의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어떤 이들은 그저 마음의 갈등이 없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삶에 갈등이 없을 수 없으나 이들은 대개 그 문제를 최소화하면서 회피하려고 한다. 이들은 진정한 평화로부터 멀어진다. 또한 완전함이란 사랑으로 포용된 상태에서 구현되는 가치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완벽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타인의 잘못, 철저하지 못하고 책임감 없는 것, 올바르지 않은 것, 비뚤어진 것만 눈에 띤다. 이와 같이 집착이란 배가 고픈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먹을 것을 찾는 것과 같다. 배가 몹시 고픈 상태에서 동그라미를 보면 빵이 상상되거나 먹고싶은 음식이 잔뜩 든 접시를 떠올린다. 아무리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려고 해도 자신 안에 부족한 것을 채우려고 에너지가 집중되는 것이다. 이것이 집착이다.
집착으로 인해 우리는 삶에서 자신도 모르게 특정한 기운(氣運)에 쏠리게 된다. 절대 선으로서의 가치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 인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집착은 우리의 무의식에서 삶의 근원적인 에너지로 작용한다. 삶을 헤쳐나갈 에너지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것이 집착이며 성격은 내면집착이 현실적으로 드러난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격 이전의 자기 본질에 시선을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성격이 ‘나 자신’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대개 우리들은 성격을 ‘나’라고 생각하면서 한 생을 살아간다. 에니어그램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역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탐구한, 또는 주요한 종교에서 말하는 인간존재에 대한 관점을 포괄하고 있다. <신의 모상을 닮은 존재><모든 중생은 불성을 갖는다><영원을 추구하는 유한한 존재><사회적 동물>등 이러한 규정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은 영적이면서 동시에 유한한 존재(동물)>라는 사실로 요약 정리된다.
(2) 우주의 본질(절대적 미덕)과 인간본질(개인의 영)
인간이 <우주본질>의 가치를 내재하고 있다는 에니어그램의 관점은 우주적인 본질이 인간의 본질이기도 하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즉,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서 <우주>와 <인간>은 본질을 하나로 하는 별개의 존재다. 우주본질이 세상, 우주를 창조한다면 개인의 본질(개인의 영)은 삶을 창조한다. 삶을 창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져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의지”란 집착에 조종당하지 않으면서 삶을 개방하는 에너지이다. 그것은 우주 질서가 개인 안에서 실현될 때 저절로 생겨나는 에너지이다.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 즉 욕심을 부리지 않으니 저절로 균형이 이뤄져 어느 곳으로도 치우치지 않는다. 고요한 마음일 때 떠오르는 생각(바램)이 곧 현실이다.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으면서 삶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자유의지를 통해 자기 삶을 창조해 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내면의 집착으로 인하여 평정심이 깨졌다. 우주적 질서로부터 일탈하여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내면의 본질은 끊임없이 우주와 합일(완전한 깨달음)을 지향하면서 삶의 소명을 향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다. 에니어그램은 우리가 집착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 자신과 일치시키고 있는 성향이 무엇인지 알도록 도와준다. 자신의 집착을 알아내어 그것을 놓게되면 내면의 균형을 이루고 영적 본질을 접하면서 창조 능력이 살아난다. 삶을 통해 이뤄야 할 소명이란 <성격 안에서 집착으로 변해 버린 우주의 기운>을 깨우쳐 내면화될 때 드러난다. 소명은 개인적이고 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우주적인 흐름에 부합되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집착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본질로 가는 첩경이 된다. 결국 <집착이라는 어둠의 터널>을 통과해서 <밝은 빛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에니어그램을 통해 해내려는 우리의 작업이다.
(3)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
인간의 본질은 그 자체로 온전한 우주의 기운을 함유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외부 대상에 관심을 돌리면서 자신에 대한 진실을 잊었다. 시공간(時空間)이라는 한계 상황 속에서 접하는 모든 것이 자기존재의 근거가 되었다. 갓 태어난 아기를 관찰하면 먹고 자고 배설하는 본능에 자신을 맡기면서 가장 자연스런 몸의 흐름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장해감에 따라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즉 환경이 요구하는 또는 요구되어진다고 여기면서 자신의 모습을 형성해 가는데 그것이 자아개념이다. “자아”는 고요한 본질이 균형을 잃고 왜곡되어 나타나는 존재의 그림자이며 자아는 집착을 실현시키려고 한다. 성격이란 자아가 삶을 통해 표현하는 집착의 현실적 모습이다. 즉 내면의 집착이 환경 및 대상에 접하면서 반응하는 양식이 성격이다. 구체적으로 이성, 감성 및 의지(행동)이 대상에 접해 어떻게 대응하고 반응하느냐는 것을 말한다.
성격은 타고난 환경과 성장과정 속에서 받게되는 상처, 부정적인 감정, 사회적인 고정관념, 가치관등에 영향을 받으며 가장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가지는 본능(사회적 본능, 자기보존 본능, 성적 본능)에 의해 또 다시 변형된다. 그 모든 근원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대상(對象)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본질의 가치에 매달려 내면의 현실로 자리잡은 집착에서 벗어나 평정심의 고요한 상태로 돌아오면 본질의 가치는 바로 삶의 소명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에니어그램을 통해 배우게 된다.
(4) 성격이란 - 집착의 현실화
우리는 찐빵을 먹을 때 겉의 밀빵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찐빵의 맛은 속에 들어있는 팥이 결정한다. 그렇듯이 우리의 삶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무의식이 조정한다. 의식 즉, 생각(바램)이 현실과 일치되도록 살려는 것이 삶을 통한 우리의 바램이다. 그러나 우주적 질서에서 벗어난 만큼 우리는 본질의 창조 능력을 상실했다. 내면집착만큼 자기 소명으로부터 이탈해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부모, 주변 환경, 사회 문화적인 가치관, 교육 등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다. 자의든, 타의든 이러한 영향으로 내면의 본질적인 집착이 변형되면서 그것에 덧붙여 여러 가지 문제가 더욱 더 복합적으로 어우러진다. 집착은 무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눈에 보이는 것이 빙산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지만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은 전체 얼음산의 일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일상 생활 속에서 인식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은 극히 제한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자신의 전부라고 착각하거나 또는 자신을 속이곤 한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나 상황 속에 있을 때는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것, 너무나 습관에 젖어 그것이 문제가 된다고 느낄 수 없는 우리의 행동 중에는 의식으로 걸러지지 않은 무의식이 표출된 경우가 많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신을 지탱시켜주는 에너지의 원천이라고 믿어지는 내면 집착의 단초는 자신도 모르게 행하는 행동 중에 감춰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의식에는 첫 번째, 자아의식이 싹트기 전부터 지금까지 삶을 통해 겪어온 수많은 느낌과 잊혀진 기억들이 쌓여있다. 부모(어머니)를 포함하여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환경 속에서 알게 모르게 겪게되는 상처와 상실감, 분노와 원망, 두려움과 공포, 수치심과 불안감등의 느낌을 주었던 상황, 불행했던 기억,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들을 우리는 의식적으로 잊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기억들은 의식에서 지워진 것 같지만 사실 무의식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우리의 사고와 행동반경에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근본적인 영향을 준다.
두 번째, 무의식에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유전적인 요인으로 우리에게 전해져오는 것들이 있다. 유전적인 요인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유전자가 있다. “부모를 닮은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부모를 닮았다는 것>은 <외모와 생김이 닮았다는 것>과 <기질과 습성을 닮았다>는 두 가지 요소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염색체의 유전인자로 인해 외모와 생김이 비슷해진다. 기질과 습성 또한 유전되어온다. 그것은 무의식을 타고 내려오는 조상의 정신적인 유전요소이다. 예를 들어 부모의 음주 양태나, 도박, 정신질환 등은 개인의 의지를 넘어서 행위를 지배하기도 한다. 그것은 정신적인 유전인자로 전해지는 조상들의 습(習)이다.
세 번째로 무의식에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가 존재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이다. 이것은 시공간이라는 한계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문제이다. 사실 인간은 삶과 죽음이라는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면의 집착에 빠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삶을 추구하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끝없이 고뇌하면서 인간존재에 대한 탐구를 지속해온 것이 인류의 정신사적 궤도이다. 에니어그램의 상징은 이러한 존재에 대한 해명으로 파고 들어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할 곳이 어디인가를 암시하고 있다. 집착은 우주본질이 왜곡되어 나타나는 우리 내면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집착은 우리가 삶을 통해 해결해야 할 숙제이다.
자신의 내면집착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아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는 에니어그램을 통해 집착(자아)을 넘어서서 자신 안에 잠든 우주의 기운을 경험하고자 한다. 우주의 기운이 곧 우리의 본질이다. 본질을 경험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온전하게 현재에 존재하기 위함이다. 현재에 존재한다는 것, 즉 현존(現存)은 몸과 마음(의식)이 지금 이 자리에 온전히 일치되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때 우리는 현재의 순간 속에서 영원의 진리를 포착할 수 있다. 지금 이 자리에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에니어그램을 통해 자기 유형을 찾아간다는 것은 집착을 알아낸다는 것이다. 유형의 집착을 알아내면서 그 동안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많은 사실들을 발견한다. 그것은 여태까지 믿어온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며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집착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내면의 균형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성격을 포기하는 것과는 다르다. 집착을 놓을수록 자신의 의지가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실현됨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에 다가가게 된다. 예를 들어 성공을 추구하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기존재에 대한 인정과 지지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성공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싶다’는 욕구의 부질없음을 깨닫게되면 자기 내면의 바램을 느끼게 된다. 그는 자신의 느낌을 따르며 그것을 위해 노력하면서 실현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비로소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삶의 충족감을 느끼게 된다. 이들은 자신 안에 내재하는 단순하면서도 솔직한 모습을 표현하면서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맞추려고 하는 허위의식을 극복하고 감춰진 진정한 내면을 표현하게 된다.
성격집착에서 빠져 나올수록 내면의 관찰자(의식)는 커지고 성격(자아)은 작아진다. 이것이 <의식의 확장>이다. 의식은 우리가 자신을 알아차리는 영역이 늘어날 때마다 더 많이 확장된다. 이러한 작업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이완시켜 삶은 고달픔에서 평화로움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긴장과 불안감은 안정과 편안함으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자기 내면의 모습을 접하기 시작하면 자신이 인생을 통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느끼게 되며, 그러면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사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여태까지 우리가 삶을 통해 끊임없이 추구해온 것이다. 에니어그램의 도움으로 우리는 먼저 성격 속에 숨어있는 집착의 문제를 탐구할 것이다.
라.에니어그램의 상징
(1) 원(circle)
세계의 주요한 종교에서 대부분 명상의 출발점으로 사용되는 원은 우주의 만다라를 상징한다. 이는 최초의 <本源的인 자기존재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바램>을 상징한다. <주체와 객체>, <너와 나>라는 분열된 의식을 극복하여, 주객이 혼융되고 궁극적으로는 분리된 의식을 <하나> 로 통합, 일치해서 <무위자연 無爲自然>의 상태 <해탈> 또는 <神과의 완전한 일치>을 이루려는 우리의 바램을 상징한다. 이는 개인적인 판단에 의한 <분열의 벽>뿐만이 아니라 문화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편견과 종교간의 벽 등 인간 삶 속에 존재하는 가치관의 상이함 속에서 하나의 흐름, 지고지순한 하나의 본질, 즉 우주의 본질을 회복, 구현하려는 의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2) 원(circle)안의 삼각형
중세 연금술에서 1은 머리(지적인 영역), 2는 심장(천체의 영역)에 해당하고, 3은 배와 생식기(원소의 세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에니어그램에서 인간은 세 가지 힘의 원천을 가진다고 본다. 배(장), 심장, 머리가 그것이다. 곧 사람은 의지와 감성과 이성의 조화로운 균형으로 자신의 인격을 완성해 간다고 보는 관점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설, 불교의 삼신일체(三身一體. 불, 법, 승), 유교의 天, 地, 人의 합일 등 주요한 종교에서는 하나의 본질이 세 가지 존재형태를 가진다고 말한다. 다시 이야기하면 세 가지 힘은 하나로 통합 균형을 이룸으로써 자아를 완성하여 우주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계기를 맞는다. 모든 존재자에게 작용하는 세 가지 근원적인 힘은 개별적이면서도 하나이며, 궁극적으로 하나의 흐름 속에 통합된다.
에니어그램은 이러한 우주의 이치를 인간에게 적용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 세 힘(머리, 가슴, 장)이 완전한 균형, 조화를 이룰 때 우주의 본질과 일치된다는 것이다. 天地(우주)에 흐르는 하나의 이치를 인간은 자신 안에 내재하고 있으며, 이를 깨달아 자신의 본성이 우주의 법칙과 일치되도록 하는 것이 원안의 삼각형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하는 의미이다.
(3) 핵사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흐름을 타고 변화, 순환를 거듭한다고 보는 것이다. 우주의 본질, 절대적 미덕은 그 자체로 영원 불멸하며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본질을 내재한 인간 및 세상의 모든 존재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적 상황 안에서 언제나 변화되고 흘러가며, 소멸과 생성을 거듭한다. 핵사드는 한 사람의 내면에 맞닿아있는 5가지 집착의 변화 양상을 보여준다. 인간은 한가지 가장 주요한 자신의 집착을 가지지만, 이러한 집착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교육 문화적인 특성 속에서 끊임없는 변화를 거듭한다. 본질적인 집착이 개인을 둘러싼 특정한 환경 속에서 변형되는데, 자신 안에 잠재적으로 접할 수 있는 5가지 유형으로 자기 모습을 구체화하면서 변화(환경에 적응하면서 퇴행과 발전)하는 흐름을 핵사드가 시사하고 있다.
마.내면 성찰시(집착을 찾을 때) 주의점
자신의 내면집착(유형)을 찾을 때는 자기성격의 부정적인 면(좋지 않은 면)에 주목해야 한다. 스트레스 받거나 화가 났을 때 우리는 숨길 수 없는 자신의 성향을 만난다. 좋은 이미지만을 보여주고 싶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또는 가장 가까운 사람만이 볼 수 있는 모습 속에 성격집착이 나타난다. 습관적으로 행해 왔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여기지 않았던 일상적인 자신의 행동들을 의식하고 느껴본다.
에니어그램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게 되면 자아이미지와 실제의 자기가 얼마나 다른지 느끼게 된다. 이것이 부정적인 성향 속에서 자기를 발견해 내는 에니어그램만의 독특한 자기성찰방법이다. 부정적인 자기 모습을 통해 내면을 알아 가는 에니어그램의 독특한 방법 때문에 우리는 드러내놓고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모습, 사람에 따라서는 평상시 자신의 문제라고 여겨왔지만 내놓고 직면하기 두려웠던 자기 성격을 거울 쳐다보듯이 봐야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렇게 하기 힘들 때, 즉 그럴 이유를 스스로 찾기 힘들다고 여긴다면 에니어그램은 그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단지 지적 유희로, 그 자신의 고정 틀을 하나 더 배가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진정으로 자기를 찾고싶다면 보기 싫고 직면하기 어려운 자신의 문제를 자기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정직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직성의 토대 하에 부정적인 자기 모습을 인정하는 용기는 진실을 찾는데 최고의 지름길이다. 내면성찰을 통해 집착을 찾고 끊임없이 순간순간 자기 행동의 동기를 바라볼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집착으로 인한 고착된 성격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되면 삶이 어떤 것에도 걸림 없이 편안해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자신 앞에 어떠한 위기가 닥쳐오더라도 그것 때문에 위축되거나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타인에 대해 수용적인 마음 자세가 대단히 확장되어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이전과는 다르게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행동의 동기에 주목해야 한다. 배고프면 밥먹고 나를 무시하면 분노가 일어나는 인간 존재의 행동과 감정 표출은 대동소이하다. 그러므로 외견상 똑같은 행동을 할 때, 예를 들어, 4번과 7번이 똑같이 기성복을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4번은 자신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까닭에, 7번은 정형화된 것은 지루하고 틀에 박혀 재미가 없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다. 똑같은 행동이라도 그 행동의 동기가 무엇이냐를 분별해야 성격유형에 올바로 접근할 수 있다. 집착은 동기에서 구별된다. 어떤 유형이나 어떤 사람도 크게 잘났거나 크게 못나지 않은 이유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삶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직면한다. 이러한 근원적인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가 내면 집착이 생기는 원인이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동화를 보면 나비 애벌레는 모든 애벌레들이 올라가는 기둥을 타고 서로의 몸을 계단 삼아 짓밟으며 끊임없이 오른다. 어떤 이는 무엇이 있나 호기심 때문에, 어떤 이는 사랑하는 이가 그 길을 올라가고 있으므로, 또 다른 이는 거기에 분명 무언가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열심히 그 길을 간다. 똑같은 길을 가면서도 우리는 제각기 서로 다른 목적과 동기(집착)를 갖는다.
어떤 번호도 다른 번호보다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 에니어그램의 모든 유형을 <신의 얼굴>이라고 본 수피들의 관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주 본질에 대한 체험을 자신의 소명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다를 뿐이다. 우열을 가린다면 그것은 그 사람만의 기준, 자기 집착에 따른 판단일 뿐이다. 또는 특정한 문화 속에서 형성된 상대적인 가치관에 기인하는 것이다. 각 번호는 틀린 것이 아니고 다만 서로 다른 것을 추구할 뿐이다. 서로 다름 속에서 조화와 균형을 찾으려는 것이 에니어그램의 또 다른 묘미이다. 개인 개인이 집착에서 벗어날 때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이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서로의 차이점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서로를 성숙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출처 :상담심리자료창고 원문보기▶ 글쓴이 : 고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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