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의 직면과 거짓 자아
김준수(D.Min.,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교수)
I. 여는 글
상담에서의 직면은 문제 해결에서 필요불가결한 과정이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감정을 공감해 주고 말을 경청해 주는 과정을 통해서 관계형성을 하며 문제를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 이해의 단계가 끝난 후에는 상담자는 내담자가 자신의 문제를 직면해서 변화를 위한 결단과 선택 그리고 책임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내담자가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지 못하면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상담의 현장에서 직면을 방해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 자신에 대한 문제의식의 결여, 문제를 직면하기 원하지 않는 마음, 문제의 결과를 책임지기 원하지 않는 마음 등 다양한 원인들이 있다. 이러한 원인들 중 하나가 방어기제이며 방어기제는 내담자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에 대한 직면을 거부하게 만든다.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문제를 직면하게 하는 과정을 마치 자신에 대한 공격이나 거부라고 여기고 더욱 자신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취하게 된다. 인간의 방어기제를 이해하는 일에 유용한 도구가 인간의 유형론이다. 왜 사람들이 같은 환경에 각기 다르게 반응하는지를 설명하는 도구가 유형론이다. 즉 사람들은 누구나 환경에 반응하는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다. 공통된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하나의 유형으로 구분하고 각자의 유형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연구해서 설명해 줌으로 인하여 자신을 이해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이러한 유형론을 통해서 인간의 반응을 분석해 보면 다양한 방어기제들을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i) 본 논문에서는 인간의 방어기제들을 성경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거짓 자아를 설명하고 거짓 자아로 인하여 파생되는 세 가지 유형과 각자의 방어기제들을 기술하고자 한다.
II. 펴는 글
1. 거짓 자아에 대한 이해
거짓 자아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 함으로 시작되었다.ii)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해서 특정한 반응의 유형들을 선택하게 되었다. 즉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자기의 방법대로 삶의 필요를 채우는 방식이 거짓 자아이다.“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하나님을 버린 인간은 자신의 방법으로 내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게 되었다. 특히 자신의 존재가치를 하나님이 아닌 타인의 판단과 평가로 채우려하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거부당하지 않기 위해서 각자의 독특한 삶의 양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삶의 패턴이 반복되면서 개개인의 독특한 성격을 형성하게 되었다. 각자의 성격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형을 벗어나서 왜곡되었다. 자신을 감추고 사람들에게 용납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하여 애쓰게 되었다. 이러한 이미지를 거짓 자아라고 부른다. 거짓 자아는 자신의 원형이 아니다 다만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자신의 허상이며 실체의 그림자다. 거짓 자아라는 스스로의 허상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방어기제라는 행동양식을 발단시킨다.iii) 그러나 자기방어기제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문제를 직면하는 과정을 거부하고 마음의 요새를 쌓아서 진리를 받아드리지 못하게 한다.
2. 거짓 자아의 형성과정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을 받았으며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신다. 단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세계 뿐 아니라 삶의 원리와 목적, 의미도 하나님에게서 말미암았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며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외부의 어떠한 동일시의 과정 없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다(출 3:14). 이 말씀은 외부의 어떤 대상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시며 아무도 하나님의 존재와 정체성에 영향을 줄 수 없는 모든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의 처음이요 마지막이 되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누구에게도 증명할 필요가 없으시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만물을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소부재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사역이 하나님을 속성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사역을 규정한다. 즉 하나님이 사랑을 베푸시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을 베푸신다.iv)
하나님은 또한 다른 피조물들과 구분하셔서 특별한 과정과 목적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로 지으셨다(창 1:31; 2:7).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이유는 그 완벽한 관계성에 있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다른 피조물들과는 구별된 특별한 관계를 갖도록 하셨다. 이러한 특별한 관계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통해서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도록 하셨다(창 2:27, 28).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이들에게 완벽한 인격과 성품 그리고 분명한 정체성과 건강한 자존감을 주셨다. 즉 사람이 자기가 누구인가라는 물음 즉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의 근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볼 때마다 자기가 누구이며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확인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자아 인식은 다른 인간관계의 근원이 되어서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건강한 관계의 토대가 되었다(창 2:25). 이들을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상대방이 자신을 보고 판단이나 평가를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직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만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들은 서로에게 자신의 모든 것이 드러난 상황에서도 자기를 숨기려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보여주고 싶은 모습 뿐 아니라 연약함과 치부를 드러내는 데에 두려움이 없었다. 어떠한 다툼이나 갈등이 없는 완벽한 조화를 이룬 열린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완전한 관계의 모형을 볼 수 있다.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가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모든 관계에서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건강한 자아의식은 서로가 자신을 감추는 표면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고 서로를 용납하는 친밀한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완벽한 피조세계는 아담의 범죄 함으로 인하여 전적으로 타락하게 되었다. 뱀으로 나타난 사단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서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여서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창조의 질서와 말씀의 약속을 대적하게 하였다(창 3:4, 5). 이들은 하나님이 자기들 생명의 근원이 되시며 존재와 의미의 근원이 되심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떠난 독립된 존재로 스스로 살아가는 길을 택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이들은 생명과 존재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떠났고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원수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 과정을 설명하면서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다고 하였다(골 1:21). 타락으로 인한 결과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깨어지고 모든 조화를 이루고 존재하던 피조세계가 혼란과 분리 그리고 대적하는 상태로 바뀌었다. 사도 바울은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피조세계가 탄식하며 고통하게 되었다고 하였다(롬 8:22). 모든 자연세계의 조화가 깨어지면서 지구상에는 끊임없는 홍수와 지진, 폭풍우 등과 같은 자연재해가 몰아치고 파괴로 인한 고통이 이어지게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을 다스리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자연재해의 피해자로서 기근과 같은 자연재해로 인한 환란을 경험하게 되었다. 인간은 육체적인 조화를 상실하게 되면서 자연 환경으로 인한 환란과 함께 육신적인 질고도 당하게 되었다.
타락으로 인한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인간 마음의 변화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최고의 피조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지, 정, 의가 잘 조화를 이루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도록 주조되었다. 그러나 타락은 지정의에 이르는 전인격적인 변질을 가져왔다. 인간의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변질되었으며 생명과 평안으로 이끄는 영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육의 생각에 이끌림을 받게 되었다(롬 8:6). 인간의 감정도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마땅히 느껴야 할 것을 느끼지 못하고 육신의 소욕에 노예가 되어서 왜곡된 감정에 휩쓸리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기능을 상실하고 감정에 의해서 주도되는 삶이 되었다. 육신의 쾌락이 우상이 되어서 마음을 다스리고 주장하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이방인의 허망하여진 마음을 기술하면서 타락으로 인하여 변질된 인간의 마음 상태를“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함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하였다(엡 4:18-19). 감각 없는 자의 의미는 경계가 없는 삶 또는 브레이크가 없는 삶을 뜻한다. 자신의 육신이 원하는 욕심을 아무런 제제 없이 행하게 되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온갖 불의, 추악, 탐욕,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그 마음에 가득하게 되었다(롬 1:29).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나타난 현상 중 하나는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정체성의 혼란이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떠난 후에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가 불확실한 가운데 존재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눈이 밝아지면서 하나님이 아닌 인간 서로가 판단하고 평가하는 시선을 의식하며 스스로 왜곡된 자아의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안과 두려움은 아담과 하와의 관계에서 친밀감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더 이상 자기 드러내기를 부끄럽게 만들었다(창 3:7). 자기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상실한 인간은 자기가 누구이며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는 불안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타락과 함께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부인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였다(창 3:5). 그 결과로 아담의 후손인 인간들은 하나님 의지하기를 거부하고 그 대신에 스스로를 의지하며 하나님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인간들은 하나님 대신에 심판자가 되어서 서로의 행동을 정죄할 뿐 아니라 서로의 존재 가치를 판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정체성이 아닌 서로의 평가와 판단에 의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었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용납하는 대신에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관계로 변질되었다(창 3:12). 타락 후의 인간관계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하는 사이에서 서로를 판단하고 거부하며 정죄하는 사이가 되었다.
거부에 대한 두려움은 점차 자신이 거부당하지 않도록 상대방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는 거짓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거짓 자아의 초점은 자신이 원하고 느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사랑받고 용납받기 위한 원함과 느낌 그리고 요구이다. 자신의 이 모습 그대로는 상대방에게 용납될 수 없고 거부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실체를 숨기고 상대방에게 용납 받을 수 있는 허상을 만든다. 자신의 실체를 부끄럽게 여긴다. 자연히 자신의 모든 에너지는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목적에 집중 된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과 원함을 억누르고 부인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신을 가리었던 것처럼(창 3:7) 인간은 자신의 실제 자아를 가리고 부인하게 되었다. 점차 거짓 자아가 중심이 되는 삶의 양식을 형성하게 된다. 거짓 자아의 특징은 자신의 실체가 누구인가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자신이 남의 눈에 어떻게 드러나고 평가되느냐에 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신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이들의 외식적인 삶이었다. 마치 연극을 하듯이 자신의 실체가 아닌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위선으로 가면을 쓰고 이중적인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용납받기 위해서 신앙의 실체인 하나님 앞에서 선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고 위선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였다. 이것이 거짓 자아이다. 이러한 위선적인 삶에 익숙해지면 어떤 모습이 실체이고 위선적인 포장인지 불분명하게 된다. 점차 포장된 자신이 실체라고 믿는 상태로 발전된다. 이와 같은 거짓 자아는 삶의 주도적인 개체가 되지 못하고 타인의 의견과 평가에 의해서 주도되는 역기능적인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창세전에 하나님이 인간을 택하신 뜻을 왜면하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노예가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3. 자아와 거부당함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룹에 소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들은 어느 그룹이 나에게 필요하며 유익한지를 끊임없이 저울질한다. 어느 사회에나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그룹들이 존재하는 것을 보아도 사람들에게 소속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성경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과의 교제 공동체로 부르시며 인간 서로의 화평한 공동체로 부르는 메시지로 채워져 있다.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교제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인간을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누군가로부터 거부당하는 경험은 가장 참기 힘든 고통 중 하나이다. 이러한 거부의 고통은 다양한 형태로 다가온다. 자신이 직접적으로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없지만 감정적으로 예민해지고 자신이 왜소하게 느껴지거나 고립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대부분 의 인간관계 갈등은 자신의 내면에서 시작된다. 상대방이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원인 제공을 할 수 있지만 더욱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바로 내 자신의 내면에 있다. 상대방의 특정한 말투나 눈초리 또는 표현들이 마음에 상처를 주고 분노하게 만들며 결국 관계를 냉각시킨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자신이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였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만일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이 마음의 상처를 주고 분노하게 하였다면 그 이유는 당신이 거부당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이 거부당했다는 느낌이 엄습할 때에는 특정한 상황이나 상대방에 대해서 과잉반응을 나타내게 된다. 그 결과로 상대방을 강하게 비난하든가 아니면 분노를 속으로 삭이면서 상대방을 미워하게 된다. 거부당함에 대한 예민한 반응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어렵게 할 뿐 아니라 자신도 힘들어지게 한다. 왜 거부당한 느낌이 스스로를 방어적이 되게 하고 과잉반응하게 만드는 것일까?
사람은 일평생 살면서 다양한 종류의 거절을 경험한다. 특히 가까운 사람의 말투나 행동 표정 은밀한 사인으로 전달되는 거부의 메시지는 더욱 큰 상처를 주며 대인관계에 영향을 준다. 이러한 거부의 메시지는 부모나 형제, 교사, 친구, 이웃 등 다양한 관계에서 올 수 있다. 이러한 거부당한 경험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쌓이게 되면 어른이 되어서도 대인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기억들은 마치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과 같아서 자신이 거부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면 기억에 저장되어 있던 과거의 느낌이 다시 되살아나게 되고 현재의 상황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상황에 반응하도록 한다. 이러한 경우에 본능적으로 과거의 상처를 다시 받지 않기 위해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반응 대신에 감정적이거나 자기 방어적인 반응을 하게 된다. 사물을 현재 자신이 경험하는 거절이 과거의 상처와 함께 느껴지면서 그 강도와 깊이가 배가된다. 즉 단순하게 현재의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비슷하게 느꼈던 상처가 되살아나면서 과잉 반응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대부분 상황에 적절한 대처가 되지 못하고 과잉된 반응이 된다. 특히 자라나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입력된 메시지는 내면 깊숙이 새겨져서 어른이 되어서도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드는 근원이 된다. 어린 시절에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당한 아이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왜곡되어 진다. 마치 오목거울이나 볼록거울에 비추어진 사물을 보는 것처럼 뒤틀린 현실을 보게 된다. 그 결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소한 현상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위험이나 두려움을 야기하는 대상이 된다. 이런 아이들은 아무런 위험의 요소가 없는 상황에서도 위험을 느끼고 두려움에 휩싸이며 감정의 혼란을 경험한다. 부모나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받는 정신적 육체적 학대는 극단적인 거부의 표현으로 받아드려지게 된다. 이러한 반복적인 거부를 많이 경험한 아이들은 항상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자신이 의지적으로 다스릴 수 없는 불안감으로 인하여 어른이 되어서도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일을 힘들어한다.
간난 아기들의 행동을 연구한 조사에 의하면 부모의 차갑고 무관심한 행동에 의해서 거부당함을 경험한 간난 아기들은 같은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부모를 거부하는 행동을 한다. 부모에게 안기지 않고 칭얼대거나 우유를 거부하기도 한다. 마치 부모를 거부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지만 실제로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 간난 아기들은 부모에게 거부당하는 고통을 피하려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거부당한 경험은 또 다른 거부로 이어진다. 간난 아기들은 대략 세 종류의 애착 유형을 형성한다. 부모가 간난 아기에게 지속적으로 관심과 사랑을 보여줄 때 간난 아기는 심리적인 안정을 갖게 되고 부모에게 애착하게 되며 이러한 심리적인 안정감은 어른이 되어서도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원동력이 된다. 두 번째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무관심한 양육 태도의 부모에 의해서 양육된 아기는 부모나 주위 사람들에게 반응을 잘 안하고 애착을 거부하는 유형으로 발전한다. 성인이 된 후에도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세 번째로 부모가 자녀에게 한순간에 관심과 사랑을 보이다가 또 다른 순간에는 태도가 돌변해서 차가와지고 무관심해지는 경우에는 불안감과 자신의 감정을 바르게 지각 못하는 이중감정을 나타낸다. 어른 된 후에도 대인관계가 굴곡이 많고 사소한 일로 관계를 단절하는 괴팍한 성격을 나타내게 된다.v)
명백한 거부와 은밀한 거부가 있다. 명백한 거부는 분명하게 표현되는 거부의 말투나 행동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적인 거부 외에도 상대방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은밀하게 전달되는 거부의 메시지가 있다.vi) 예를 들면서 부모의 이혼이 직접적으로 자녀들을 거부하는 행위는 아닐지라도 자녀들에는 부모가 자신들을 배척하는 강한 거부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또는 어린 시절에 부모가 사망하는 사건도 이혼과 같이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감정을 야기할 수 있다. 이외에도 부모가 약물 중독이나 또는 다른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자녀들에게 관심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지 못할 때 또는 군 복무와 같은 상황으로 자녀들과 충분한 교류를 하지 못할 때에도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부모가 언어적, 육체적으로 사랑의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해 주지 못할 때 자녀들은 거부당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부모가 자녀들의 외모나 학교성적 성격 등을 비교해서 판단하는 행위도 자녀들을 거부하는 메시지가 된다.
부모가 자녀에게 조건적인 사랑 또는 행위에 근거한 사랑을 했을 때에 자녀는 자신의 존재가 거부당하는 상처를 받는다. 자녀의 학업이나 음악, 또는 운동 등과 같은 영역에서 기량을 발휘할 때에 사랑과 관심을 주지만 그렇지 못하고 부모를 실망시킬 때에는 사랑과 관심을 주지 않음으로 일종의 부모를 실망시킨 것에 대한 처벌을 하는 경우에 자녀는 자신의 존재가 거부당했다는 강함 느낌을 갖는다. 부모가‘예’와‘아니오’를 함께 사용할 때에도 자녀는 정서적인 혼란에 빠지게 되고 부모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예를 들면서 자녀가 밖에 놀러 가겠다고 할 때에 엄마가 말하기를 그래 가서 놀아라, 그런데 내 몸 아픈 것은 아무도 상관을 안 하니까 슬프다고 하였다면 가서 놀아야 되는지 집에 있어야 하는지 매우 혼란스럽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예’와‘아니오’를 분명하게 하라고 하셨다(마 5:37). 부모에게 자신이 용납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게 되면 부모에게 용납 받는 자신이 되기 위해서 거짓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즉 상대방이 원하고 좋아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자연스런 자아가 아닌 인위적인 자아를 만들게 된다.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는 바는 자연스럽게 억누르고 상대방이 기대하는 생각과 느낌과 원하는 바가 중심적인 자아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참 자아는 거짓 자아로 대체되면서 참자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숨기려 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는지가 불분명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 내면에 공허와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무엇인가로 채우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vii)
거부당하는 경험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남긴다. 거부의 경험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또 다른 거부당함을 피하기 위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노력하게 된다. 이러한 시도는 각자의 성격에 따라서 다양한 인간관계의 유형으로 표출된다. Matt Barnhill은 거부당함의 상처로 인하여 나타나는 네 가지 유형의 인간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친밀감을 힘들어하고 주위 사람들과 거리를 둔다. 겉으로는 매우 부드럽지만 사람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친밀한 관계로 발전시키지 못한다. 자신의 약점이나 잘못이 드러나는 경우에는 예민해지며 매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주위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이유는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면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다양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면서도 친밀한 관계는 갖지 못한다. 둘째, 거부당한 상처들로 인하여 매우 까다로운 성격을 형성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짜증이나 비난 그리고 빈정거림이 많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하여 가깝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쳐내고 거리를 두게 만든다. 그러나 자신은 오히려 자기를 멀리하는 사람들을 탓하면서 그들을 비난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잘못이 아닌 주위 사람들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함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상처를 숨길 수 있게 된다. 셋째, 유형은 상대방에게 너무 높은 기대를 하고 상대방이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결국 자신이 거부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해서 스스로 거부당하도록 만든다. 네 번째는 가장 보편적인 인간관계의 유형으로 관계중독에 빠진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용납을 받으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해야 한다고 믿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실패자라고 여긴다. 자연히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동분서주 노력하지만 결국 실패한다.viii)
4. 거짓 자아와 성경적 유형론
성경에서 유추되는 유형론은 인간이 범죄 한 후에 거부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힘으로 상대방을 누르고 공격함으로 우위를 차지하려는 공격형이고 두 번째는 공격을 당하는 상황을 피해서 도피함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회피 형이며 마지막으로는 상대방에게 자신을 잘 보여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 형이다. 이 세 가지 대처 유형은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행한 세 가지 행동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일차적으로 이들은 범죄 한 후에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깨닫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자신을 가렸다(창 3:7). 이들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인위적으로 덮고 가림으로서 하나님에게 용납 받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에는 수치와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그 때에 이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아담과 하와는 두 번째 전략으로 하나님을 피해서 숨었다(창 3:8). 이들의 두 번째 전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들을 찾으시고 그 잘못을 추궁하셨다. 이러한 위기에 몰린 이들은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책임 전가를 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창 3:12-13). 하나님은 이들에게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시고 그리스도를 통한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의 길을 열어주셨다. 인간들은 아직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문제를 인정하고 자백하며 용서와 화해로 나아가는 해결의 길을 택하기보다 문제를 부인하고 회피하며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자기방어기제들을 사용하려 한다. 이러한 대처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죄로 인한 세 가지 유형은 하나님이 주신 건강한 마음의 필수요소인 친밀감, 삶의 경계 그리고 다스림의 변질된 열매이다. 즉 수용형은 사랑과 선함 그리고 돌봄과 같은 긍정적인 기능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공격형은 리더십, 강함, 그리고 회피형은 독립심, 자족함, 지혜로 발전될 수 있다.ix)
1) 공격형
공격형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갈구하고 특정한 영역에서 뛰어나거나 많은 업적을 통해서 우위를 차지하려 한다. 이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고 힘을 행사할 수 있다고 느낀다. 실제로 특정한 영역에서 기량을 발휘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한다. 이들은 강한 모습을 보이려하고 공격적이며 속임수에 능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기분에 둔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이기려고 한다. 이들이 마음 깊은 곳에 가지고 있는 생각은 만일 내가 강하고 우월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기거나 상처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상대방의 사랑과 은혜를 수용하거나 가면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거짓 자아를 버리기가 어렵다. 공격적 대처의 동기는 힘을 통해서 상대방을 제압하고 주위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는 데에 있다. 공격적인 대처는 분노를 발하거나 논쟁을 하고 상대방을 지속적으로 비방하며 모든 잘못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며 상대방의 말을 무시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물리적인 폭력이나 소리를 지름 등등으로 표출된다.
공격적인 대처에 익숙한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과의 갈등과 다툼이 빈번하다. 어떤 문제도 상대방에게 전가하며 매도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반항함으로 싸움이 고조되든가 아니면 상대방이 대결을 피해서 뒤로 물러나고 양보하든가 억지 순종으로 상황을 무마하려 들 수도 있다. 공격형은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잘 주며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자신의 목표를 관철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어린아이는 타인에 대한 이해나 배려의 기능이 없다.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는 데에 급급하게 된다. 청소년기에는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강하게 나타난다.x) 많은 청소년들이 자기 세계에 몰입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고려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점차 이타적이 되고 성숙한 인격체로 발달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극단적인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유아기적인 성향을 버리지 못한 미성숙한 인격의 표출이다. 사도 바울은 이기적인 태도로 시기하고 분쟁하는 고린도교인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라고 하였다(고전 3:1-3).
이들은 자신이 법위에 군림한다는 환상을 가지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서 현실감각이 결여된 행동을 하기도 한다.xi) 이러한 대처의 결과로는 인간관계가 단절되거나 극히 피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고 서로를 속이고 조종하는 현상들이 많아진다. 하나님을 마치 요술 방망이로 여기며 자신의 목표가 좌절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원망한다.
공격형의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적대적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세상은 양육강식의 진화론적인 원리에 의해서 움직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이겨야한다고 생각한다.xii) 상대방을 조종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조종하기 위한 행동은 다양하게 표출된다. 힘을 사용해서 상대방을 제압하고 우위를 차지하려는 행동이 될 수도 있고 또는 간접적으로 조르거나 강청해서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도 한다. 자신은 나서지 않으면서 배후에서 조종하기도 한다. 직접적으로 조종하든지 아니면 간접적으로 교묘하게 조종하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이용하고 우위를 차지하려고 한다. 인간관계에서 우선적인 관심은 상대방이 나에게 어떠한 유익이 되느냐에 있다.xiii) 공격형도 접근형과 같이 그 마음에는 두려움이 많다. 그러나 겉으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더욱 강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한다. 대인관계에서 상대방을 압도하기 위해서 자신을 부풀린다.xiv) 자신의 학력이나 경력을 위조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과장해서 상대방에게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한다. 자신이 두려한다는 사실을 보이기를 극도로 싫어한다. 속으로는 두려우면서도 겉으로는 부인하며 오히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모한 위험을 감수한다. 두려움 뿐 아니라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를 극도로 싫어하며 감추려한다. 이러한 태도로 인하여 감정표현이 제한된다. 자신의 약한 감정의 노출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슬퍼하거나 울기가 어렵다. 자신의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려고 애쓰게 되며 자연히 감정이 둔해진다. 이와 함께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한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지적을 공격이라고 여기고 참지 못하며 방어적으로 대처한다. 자기의 고집이 세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경청하지 않는다. 자신의 논리에 빠져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세상은 전쟁터와 같아서 오직 강한 자 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은 삶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근원이다. 남보다 성공하고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모든 일에 열심을 내고 노력한다. 남보다 더 노력하고 부지런하게 일한다. 기업의 총수나 단체의 장을 차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어떤 조직에 들어가도 윗자리에 앉기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한다. 마치 잘 돌아가는 기계와 같이 자신의 감정은 억누르고 오직 힘과 성공을 얻기 위해서 달린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을 하였고 높은 자리에 올라섰지만 그 마음은 공허하고 인간관계는 단절되어 있다. 사람을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여기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에는 관심이 없다. 공격형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느끼며 거리를 두고 대한다. 사람들을 자기의 뜻대로 조종하고 명령할 수 있는 힘과 권력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이들 중에 지능지수가 높고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빠른 두뇌 회전과 자신의 매력을 활용해서 사람들의 신뢰와 환심을 얻는다.xv)
신앙생활의 핵심은 포기와 섬김이다. 하나님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고 순종하며 이웃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삶이 신앙이다. 그러나 공격형의 사람은 자신을 포기하고 남을 섬기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여기고 이용하려 한다. 하나님을 위한 헌신은 더 큰 성공과 권력을 얻기 위한 투자라고 여긴다. 교회의 봉사에 앞장서고 헌금을 드리며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근본 동기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을 받고 교회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자신의 헌신에 대한 결과가 주어지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쉽게 좌절한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다가 한 순간에 교회를 떠나거나 분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공격형의 교회의 지도자는 교회의 성장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성공과 힘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 다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교회 성장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지만 그 동기는 신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공격형은 다스림의 기능이 변질된 것이다. 다스림은 하나님의 중심적인 속성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전능왕이시며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분이라고 선언하고 있다.“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위의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 이다(시 67:4).”“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애 5:19).”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고 공의로 다스리신다(대하 12:6). 창세기의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사건은 하나님이 왕이시며 주인 되심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다스리는 속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사람에게도 주어졌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의 중심된 존재로 지으시고 사람을 통해서 만물을 공의로 다스리기를 원하신다(창 1:28). 하나님의 사람을 통한 통치는 아담에게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이름을 짓게 하시는 사건에서 잘 나타난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모든 만물을 공의로 다스렸으며 피조세계는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이러한 공의의 다스림은 깨어지게 되었다. 타락 후에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버리고 자신의 욕심과 정욕에 따라 통치하게 되었으며 온 피조세계는 혼란과 무질서에 빠지게 되었다. 인간의 통치는 절대적인 다스림이 아니었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통치자가 되시며 인간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역에서만 다스리는 기능을 나타낼 수 있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자신을 다스려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신 처사였다. 즉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다스리는 분이심을 인정하는 행위였다. 하나님의 다스리는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고 교만해진 인생들을 곤고하게 하시며 낮추신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높아진 느부갓네살왕은 인생의 곤고함을 경험하고 나서야 겸손하게 되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다.“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 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를지로다(단 4:34).”xvi)
사단의 유혹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범죄 하게 되었다.“여자가 그 나무를 본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과실을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마음의 정욕대로 행하며 스스로의 통제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피조세계의 질서는 깨어지고 모든 관계가 변질되었다. 인간의 다스림은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서 하기 보다는 자기의 욕심대로 통치하게 되었으며 자신이 다스려야 하는 영역의 한계를 망각하게 되어다. 스스로 다스린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죄의 노예가 되어서 통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변질된 다스림은 주위 사람들을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이용하고 교묘히 조종한다. 자기의 뜻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언어적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며 보복한다.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여기고 대적하든가 아니면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공격한다. 세상을 전쟁터로 여기며 오직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항상 전투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모든 사람들을 적대적으로 대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범한 인간들에게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체계를 다시 회복시키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모든 율법들을 정리하셔서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하셨다. 즉 첫 번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두 번째는 이웃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의 절대적인 통치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고 이웃 사랑은 주위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며 이들을 섬기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정복자를 상징하는 말을 타지 않으시고 나귀를 타심으로 평화의 왕으로 오심을 나타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다스림은 곧 섬김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자세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다스림의 권세를 다시 회복하는 방법이다.
2) 접근형
접근형 또는 수용형은 다른 사람들의 용납을 너무 간절히 바라며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할 수 있도록 모든 총력을 기울인다. 이들은 매우 순종적이며 협조적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모든 결정을 위임한다. 이들은 문제를 야기해서 관계가 힘들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에 자신의 의견은 무시하고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관계의 깨어짐을 막으려한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거나 상대방을 직면하기를 두려워한다. 이들의 기본 철학은 만일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고 이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은혜와 진리가 동반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직면하고 진리 가운데서 깨어지는 과정도 필요하다. 무조건 예가 사랑이 아니고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하는 태도가 성경적인 사랑이다. 접근형은 대인관계에서 친밀감과 소속감이 중심 목표이다. 친밀감과 소속감을 추구하는 이유는 내면의 불안으로 인하여 안정감을 얻기 위함이다. 이 유형은 자신을 매우 약하고 작은 존재로 보며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험한 세상에서 생존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자기를 원하고 좋아하며 용납하고 인정해 주기를 갈망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며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자기가 필요한 사람으로 인식되어서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주위 사람들의 필요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자신이 그 필요를 채워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동시에 힘 있는 주위의 특정한 사람이 자기를 지켜주고 돌보아주며 인도해 주기를 필요로 한다. 대처의 동기는 사람을 두려워하며 모든 사람에게 잘 보여 지기를 원함에 있다.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두려워하는 대상이 우상화되며 종속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이러한 유형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여 지며 상대방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항상 순응하는 사람이 된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고 항상 상대방의 의견에 이끌리는 경향이 많으므로 주장이 불분명한 사람으로 보인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보다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자신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근거로 스스로를 평가한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의해서 자신의 자존감이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가장 보편적인 자아의식은 스스로가 약하고 무력한 존재로 본다. 홀로 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갖는다. 누군가 자기를 지켜주고 보호해 줄 대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xvii) 이와 함께 자신이 매우 열등하다고 여긴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멋이고 능력이 있으며 똑똑하고 도 좋은 학벌과 집안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열등감으로 인하여 매사에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고 사람들 앞에서 주눅이 든다. 인간관계에서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xviii) 자신의 가치가 타인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하고 직접적인 평가 뿐 아니라 간접적인 평가에도 민감하다. 특히 공격적이거나 차갑게 대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더욱 위축된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평가와 태도에 의존한다. 상대방의 인정이나 친절하거나 따뜻한 태도에 자존감이 급상승하고 이와 반대로 조그만 거부의 메시지나 불친절하거나 차가운 태도에 급강하한다. 어떠한 비난이나 거부의 메시지도 엄청난 위기로 여겨지고 감당하기가 힘들다. 접근형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인정받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이타적이고 헌신적이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한다. 다른 사람과의 다툼이나 갈등을 두려워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하려한다. 또한 능동적으로 자기의 삶을 살거나 홀로서기를 하지 못하고 의존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모든 관심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소속감을 갖는 데에 있으므로 자기의 감정을 인식하거나 돌보지 못하며 자신이 좋아하거나 즐기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자신을 매우 약하고 무능하며 사리판단을 올바로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본다.xix) 직장이나 학교 또는 가정에서 책임지는 일을 기피한다.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감이 없고 항상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앞선다. 주위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 그 뿐 아니라 자존감이 낮아지고 삶의 에너지가 고갈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지극히 피상적이 되어서 인격적인 관계를 갖지 못한다. 부부관계에서도 이러한 패턴이 작용한다. 결혼을 하는 목적도 자신을 지켜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차갑고 상처받기 쉬운 세상에서 혼자 사는 것은 위험하고 두렵다. 누군가 나만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지켜줄 사람이 있으면 위험에서 벗어나고 더 이상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다. 부부관계에서 자기주장은 극도로 자제하고 상대방에게 순종하며 용납받기 위해서 노력한다. 배우자의 사랑과 보호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하며 일방적으로 배우자에게 의존하는 관계를 형성한다. 배우자로부터 사랑받고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으려고 한다. 이러한 확신이 결여 될 때는 심리적인 불안을 경험하며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접근형은 하나님의 속성인 친밀성이나 하나 됨이 변질되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은 하나님 자신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거하시며 서로 교통하시는 관계에서 나타난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사랑의 교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친밀한 교제가 필수적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인간들과 깊은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를 나누시기 원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교제를 통한 하나됨과 친밀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뿐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이들과 교제하셨다. 이 뿐 아니라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신 후에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하시면서 돕는 배필을 지으셨다(창 3:18).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도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는 서로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공존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서로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xx) 모든 동물들은 먹이사슬을 이루면서 공존하고 있다. 물의 오염으로 먹이사슬의 기초가 되는 프랭크톤이 감소하면 그 영향이 도미노 현상으로 번져가게 되고 생태계 전체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온다. 지구상의 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재앙의 영향은 그 지역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파급된다. 교회나 가정도 한 지체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지체의 어려움은 전체의 어려움이 된다.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친밀감을 느끼는 기능은 인간의 생존과 성숙을 위해서 절대적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없이 영적으로 성숙할 수 없으며 인간관계의 친밀감을 경험하지 못하고 정서적인 성숙이 불가능하다.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은 외로움이다. 단절된 관계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창조의 원리가 아니다. 형무소에서 가장 심한 조치는 독방에 감금하는 것이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서 삶의 기쁨을 느끼며 영적이고 정서적으로 성숙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그리고 서로의 관계에서 완전한 친밀감을 누렸다.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하나 됨을 인하여 벌거벗었으나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 2:25). 그러나 이러한 친밀감은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이들은 자신을 가리고 숨기며 서로를 비난하는 관계로 전락하였다. 관계의 친밀성은 그 관계가 깨어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에 마음이 저리고 아프며 상대방이 보고 싶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이유는 떠난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픔은 얼마나 상대방과 깊은 친밀감을 느꼈는지를 대변해 준다. 아담과 하와도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교제를 관계가 깨어진 후에 실감하게 되었다. 타락 후의 인간 역사는 미움과 전쟁, 시기와 질투로 오염되었다.
진정한 교제를 상실한 인간은 허무한 마음을 채울 대용품을 찾게 된다. 요즘 신문 지상에 오르는 다양한 중독 현상들은 친밀한 교제를 상실한 공허한 마음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채우려는 시도이다. 일중독, 음식중독, 약물중독, 성중독, 쇼핑중독, 인터넷 중독, 관계중독 등등 수많은 중독들은 인간이 얼마나 의미 있는 관계를 갈망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후에 그 마음의 빈 공간을 하나님 아닌 대상으로 채우기 시작하였다. 중독의 대상이 꼭 나쁜 것이 아니다. 일이나 음식이 나쁜 것이 아닐지라도 절제되지 못하고 삶의 균형을 잃게 만들면 역기능을 나타내고 파괴적인 요소가 된다. 특히 관계중독은 특정한 인간관계에 집착하게 됨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관계이다. 건강한 교제가 상실된 심령에 이러한 왜곡된 집착이 뿌리를 내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친밀한 교제를 다시 회복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 건강한 친밀감의 회복을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하나님 자녀 되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확신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회복해야 한다. 특히 자신이 편하게 나눌 수 있는 교제권이 회복되어야 한다. 자신을 용납해주고 지지해주며 격려해 줄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남이 중요하다. 많은 교제들이 용납과 지지보다는 거부와 비난으로 가득하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애통하는 마음이 되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누는 과정에서 마음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
3) 회피형
회피형은 사람들을 피하고 혼자 있기를 즐겨하는 특징을 가진다. 이들은 아무 일에도 끼어들지 않으면 상처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사람들과 떨어져서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이들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 맺기를 힘들어하고 감정적인 교류도 나누기를 부담스러워 한다. 수용형은 회피형이 강하게 보이기 때문에 사랑과 친밀감을 기대하며 결혼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불행의 시작이 되고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를 채우지 못하고 고통을 당한다.xxi) 회피형의 동기는 소심함, 실패의 두려움, 상황을 도피로 모면함 등이 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숨었던 것처럼 문제를 직면하고 대처하기 보다는 뒤로 물러서고 도망함으로 문제를 덮으려한다. 회피하는 반응의 유형들로는 상대방을 의도적으로 피하거나 차갑게 대며 우울증에 빠지거나 자신을 비난한다. 많은 경우에 힘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대체 수단으로 다양한 중독에 빠진다. 중독의 대상으로는 술, 마약, 일, TV, 도색잡지, 음식, 음악 등이 있다. 그리고 자기합리화에 능하고 완벽주의 적인 경향이 많다. 이러한 유형은 주위 사람들에게 무책임하게 보이며 그 결과로 비난의 대상이 된다. 당사자는 외로움을 많이 느끼며 절망감으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자신이 상대방에 의해서 피해를 받고 있다는 의식이 강하다.
누구나 사람들과 격리되어서 혼자의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적으로 내향적인 사람일수록 사람들과의 교제를 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자기만의 시간을 통해서 에너지를 다시 보충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피하셔서 홀로 하나님과 기도하는 시간을 보내셨다. 특히 중요한 선택이나 결정을 해야 할 상활에서는 무리들을 떠나서 혼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이러한 사람들과의 격리는 누구나 때때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한 격리의 도를 넘어서 삶의 중심 경향이 사람들과의 접촉을 회피하고 혼자 지내기를 즐기는 삶의 유형이 회피형이다. 이들은 사람들과 가깝게 어울리는 것을 힘들어한다. 이들은 단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격리된다. 자신으로부터 격리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감정적인 반응의 감소이다. 감정적인 느낌의 마비가 오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잘 분별하지 못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추구하며 좋아하고 소망하는지가 불분명해진다.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와의 단절이 일어난다. 그 결과로 희로애락의 감정 표현이 둔해진다. 자신과 격리된 또 하나의 현상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현상이 있다. 특정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에 자신이 그 상황 속으로 몰입되어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상황에 대한 판단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상황을 1인칭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데에는 둔하다.xxii)
이러한 현상은 다른 사람들과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욕구에서 온다.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감정적으로 엉키는 것을 피하고 사전에 방지하려는 의도이다. 자신의 둘레에 벽을 세우고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며 자기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고집하려는 바람이다.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거나 도움을 받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그러기에 가능하면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는 자급자족의 정신이 강하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신에 대해 분노한다. 예를 들면서 몸이 아파서 다른 사람의 신세를 져야하는 상황이 되면 스스로를 자책하고 도움 자체를 고마워하지 않는다. 길을 잃고 헤매는 상황에서도 길을 묻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 자신의 개인생활을 침해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누군가 자신만의 공간에 들어오거나 간섭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신앙생활에서도 교회에 등록을 하고 다니기보다는 익명으로 다니기를 원한다. 교회의 등록을 기피하는 이유는 교회의 목사나 다른 교인들의 간섭이나 사생활을 침해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급자족이나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하는 생활태도는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된다.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다스림을 받는 생활이다. 과도한 자급자족의 정신이나 프라이버시에 대한 집착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개인생활의 침해라고 여기고 거부하며 스스로의 벽을 허물지 못하게 하며 다른 신자들과의 지체의식을 인정하지 못하게 한다.
회피성성격장애는 비난이나 거절에 매우 예민하다. 이들은 친구가 거의 없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며 주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이들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는데xxiii) 첫째는 매우 수줍어하는 성격으로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인하여 사람들을 대하고 어울리는 것 자체를 꺼려하는 경우이다. 이들 가운데 천성적으로 사람들을 피하는 경우도 있지만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관심과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방치된 가운데 성장하였거나 사회성을 발달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감정적인 에너지의 수위가 낮기 때문에 감정 표현이 별로 없다. 결혼생활에서도 이러한 성격의 배우자는 상대방에게 무감각하고 감정적인 표현이 거의 없기 때문에 부부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들은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기능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이다. 함께 있어도 거의 말이 없고 감정 표현을 안 하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부부관계 뿐 아니라 직장이나 학교 교회에서도 침구나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없이 주로 외톨이가 된다. 이들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교제하는 것 자체에 관심이 별로 없다. 둘째는 거부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을 피하게 만드는 경우이다. 거부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람을 피하는 사람들은 성장과정에서 부모나 주위 사람들에게 직, 간접적인 육체적 언어적 폭력을 당한 사례들이 많다.xxiv) 예를 들면, 자신의 외모나 가정환경 또는 학교성적 으로 인하여 부모나 친구들에게 반복적으로 놀림을 당한 경우에 대인관계에 자신이 없어지고 사람들을 피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부당할 것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많다. 이들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교제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하거나 무시할 것 같은 두려움이 사람들을 피하게 한다. 또한 과거에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기억들이 되살아나서 친밀한 관계를 거부하게 만든다.
회피형은 결혼생활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경험한다. 결혼생활 자체가 배우자와 일평생을 함께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결혼 자체를 부담스러워하고 기피한다. 결혼 후에도 배우자와의 친밀감을 형성하기가 힘들다. 배우자의 다양한 요구가 자신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침해로 여겨지기 때문에 서로 갈등하고 다투는 일이 잦아진다. 상대방의 조언은 자신을 억압하고 주관하려는 시도라고 느껴지기에 받아드리지 못한다. 회피형과 접근형이 서로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면 두 사람의 추구하는 방향이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많은 갈등을 야기하고 상처를 준다. 접근형인 아내는 회피형인 남편의 행동을 자신에 대한 거부로 받아드린다. 또한 남편은 아내의 친밀감에 대한 욕구가 자신을 구속하고 간섭하는 행위로 여겨지면서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서 거리를 두려고 한다.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접근형은 상대방이 나를 과연 좋아하고 용납해 줄 것인가에 우선적인 관심이 있고 공격형은 상대방이 나에 비해서 얼마나 강하거나 능력이 있느냐 또는 나에게 얼마나 유용한가가 관심사이다. 이에 비해서 회피형은 상대방이 과연 나를 구속하거나 간섭할 것인가 아니면 혼자 있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에 있다.
하나님은 인간 한사람 한사람을 독특한 존재로 지으셨다. 인간들은 각자의 독특한 성격과 외모 그리고 달란트를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교회를 몸으로 비유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로 신자들 모두가 한지체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구절에서도 모든 지체가 각기 다른 모양과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고전 12:12-21). 교회에서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각 지체에 주신 역할은 각자 다르다(고전 12:28-30). 하나님이 교회에서 목사에게 주신 역할이 있고 장로나 집사에게 주신 역할이 있다. 이러한 역할의 경계가 잘 유지되어야 건강한 교회가 된다. 만일 교인 모두가 목사의 역할을 하려고 한다면 교회의 질서는 무너지고 혼란이 가중될 것이다. 신자들 각자는 교회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만 주신 사역의 영역이 있다. 이러한 경계를 넘지 않고 다양성 가운데 하나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즉 지체가 하나 되기 위해서 자신의 독특성을 버릴 필요가 없다. 지체 안에서 친밀감을 나누고 하나가 된다고 해도 나에게 주어진 독특한 삶의 영역은 유지되어야 한다. 가정에서도 식구들이 마음을 열고 대화하며 서로 깊은 교제를 통해서 친밀한 관계로 묶여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자녀의 경계는 유지되어야 한다. 가족의 역할이 뒤바뀌어서 자녀가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는 가정을 역기능 가정이라고 말한다.
구별됨과 하나 됨은 서로 상반된 개념이면서도 신자들 가운데 동시에 존재한다.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개별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러기에 신자들 각자는 책임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신자는 마지막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신자들 각자가 자신의 몫을 심판받게 된다(고후 5:10). 인간은 다른 사람의 몫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신자가 감당해야 할 책임의 영역을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 6:2-5).”본문에서 각자의 짐을 지는 것과 서로의 짐을 지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명령이 아니다. 서로 져야 하는 짐은 천지재앙이나 불의의 사고로 도저히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칭한다. 만일 지체 중 한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장애인이 되었다면 모든 지체들이 힘을 모아서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남이 져 줄 수 없는 자기 각자의 몫이 있다. 5절의 자기의 짐은 바로 내가 책임져야 삶의 영역을 표현하고 있다.xxv) 만일 자기가 책임져야 할 몫을 남에게 떠맡긴다면 짐을 맡는 사람이나 맡기는 사람 모두가 해를 당한다. 아무리 교회의 한 몸 된 지체나 가정의 식구라 할지라도 이 원리는 지켜져야 한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에 자녀가 감당해야 할 짐을 대신 져 주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서 TV를 늦게까지 보다가 숙제를 못한 아들이 선생님에게 혼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대리 숙제를 해 주었다면 자녀가 당장의 어려움은 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책임지는 인격형성에 역효과를 가져온다. 부모가 자녀의 삶에 너무 밀착되어서 분리를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장성한 아들이 결혼해서 분가하려고 하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럴 수 있느냐고 죄책감을 주어서 붙들려고 한다. 건강한 심리적 경계가 있는 사람은‘예’와‘아니요’를 분명하게 표현한다. 또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과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의 한계를 잘 구별한다. 자신의 감정과 다른 사람의 감정을 구분 할 줄 안다.
III. 맺는 글
상담의 직면은 모든 변화의 초석이다. 자신의 문제에 대한 직면 없이는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하다. 건강한 정서의 특징은 현실을 대면하려는 것이고 정서적인 질병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현실을 외면하려는 것이다.xxvi) 스스로의 문제를 직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방어기제이다. 내담자가 나타내는 방어기제들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대처하였을 때에 자신의 문제를 건강하게 직면할 수 있게 된다. 거짓 자아는 자신의 실체를 숨기고 상대방에게 용납받기 위해서 내 세우는 허상이다. 방어기제들은 거짓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 내 세우는 행동양식이다. 본 소고에서는 이러한 방어기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거부에 대한 두려움으로 형성된 거짓 자아를 성경적인 유형론을 토대로 살펴보았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타락과 함께 형성된 거짓 자아는 스스로의 문제를 직면하기보다는 회피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도록 만들었다. 상담을 통해서 내담자가 자신이 행하는 방어기제적인 행동들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을 때에 좀 더 효과적인 문제의 직면이 가능하다.
참고문헌
․ LaHaye, Tim. Spirit Controlled Temperament.「성령과 기질」. 서울: 생명의말씀사. 1978.
․ Ebert, Andreas Rohr, Richard. Discovering the Enneagramm : An Ancient Tool for a New Spiritual Journey. 이화숙 역.「내안에 접혀진 날개」. 서울: 열린. 1999.
․ Bennet, E. A. What Jung Really Said. 김형섭 역.「한권으로 읽는 융」. 서울: 푸른숲. 1997.
․ Keyes, Dick. Beyond Identity. Michigan: Servant. 1984.
․ Savage, Elayne. Don't Take It Personally .New York: Barns & Noble. 1997.
․ Solomon, Charls. The Rejection Syndrome and the Way to Acceptance. np: Solomon. 1998.
․ Seamands, David. Healing Grace. Wheaton Illinois: Victor. 1988.
․ Wardle, Terry, Wounded (Pennsylvania: Christian. 1994.
․ Horney, Karen. Neurosis and Human Growth. New York: W. W. Norton.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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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ates, Wayne E. Behind the Mask.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1987.
․ Horney, Karen. Our Inner Conflict. New York: W. W. Norton. 1945.
․ Townsend, John. Hiding from Love. Colorado: Nav. 1991.
․ Hauck, Paul A. Overcoming the Rating Game.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1991.
각주
i) 유형론은 인간의 행동을 일정한 수의 성격 유형으로 분류하고 이해하려는 이론이다. 인간 역사를 통해서 다양한 종류의 유형론들이 발전되었다.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네 가지의 혈액, 흑즙, 담즘, 점액질의 체액들을 따라 인간의 기질을 성급한 기질, 우울한 기질, 화를 잘 내는 기질, 냉정한 기질로 나누었다. 또한 융은 외향-내향, 지각-직관, 사유-감각의 세 쌍의 경향성을 제시하였으며 그 후에 이사벨 부리그스 마이어스가 한 쌍을 첨가하여 16가지 성격 유형으로 인간을 분류하는 MBTI를 개발하였다. 에니어그램도 인간의 유형을 아홉 가지로 분류하여서 각 유형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방어기제 등을 통해서 왜곡된 자아를 발견하고 회복하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다양한 유형론들은 결코 인간을 완벽하게 분류하지 못한다. 단지 인간 이해를 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활용될 뿐이다. Tim LaHaye, Spirit Controlled Temperament.「성령과 기질」(서울: 생명의말씀사, 1978); Andreas Ebert, Richard, Rohr, Discovering the Enneagramm : An Ancient Tool for a New Spiritual Journey. 이화숙 역,「내안에 접혀진 날개」(서울: 열린, 1999)
ii) 거짓 자아는 의식하는 자아로서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 사회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를 모방해서 배우면서 형성된다. 하나님을 상실한 인간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의식하는 유일한 대상이 되었다. 융이 삶을 영위하는 데에 필요한 조건들을 지칭하는 페르소나와 비슷한 개념이라고도 볼 수 있다. 페르소나는 원래 연극배우가 쓰는 탈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점차 인생이라는 연극의 배우인 인간 개인을 가리키는 성격으로 쓰이게 되었다. 성격은 그 사람의 본질이 아니다. 단지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학습되어서 뿌리 내린 반응의 틀 일 뿐이다. 사람들은 자아와 자기는 같다고 착각하며 동일시한다. 그러나 자아는 자기의 한 일부분일 뿐이다. 자아는 자기의 표출된 일부분으로 마치 빙산의 일각과 같다. E. A. Bennet, What Jung Really Said. 김형섭 역,「한권으로 읽는 융」(서울: 푸른숲, 1997), 153-77.
iii) 정신분석학에서 사용하는 방어기제는 인간 내면의 여러 측면인 자아, 초자아, 본능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감소시켜서 스스로 고통을 덜 받으려는 심리적인 작용이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사용하는 방어기제는 인간관계의 거부당함에서 오는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충동적으로 반응하는 삶의 양식이다.
iv) Dick Keyes, Beyond Identity, (Michigan: Servant, 1984), 75.
v) Elayne Savage, Don't Take It Personally (New York: Barns & Noble, 1997), 97-9. 버클리 캘리포니아주립대학의 심리학자인 메리 메인과 인류학자인 루스 골드윈이 간난아이의 애착상태를 연구하기 위해서 12개월 된 영아들을 엄마로부터 일정기간 분리시킨 후에 다시 상봉시키면서 그 반응을 조사하였다.
vi) Charls Solomon, The Rejection Syndrome and the Way to Acceptance (np: Solomon, 1998), 29-31.
vii) David Seamands, Healing Grace (Wheaton Illinois: Victor, 1988), 97-8.
viii) Terry Wardle, Wounded (Pennsylvania: Christian, 1994), 93-6.
ix) Karen Horney, Neurosis and Human Growth (New York: W. W. Norton, 1950), 22.
x) David Sue, Derald Wing Sue, Stanley Sue, Understanding Abnormal Behavior (Boston: Houghton Mifflin, 2003), 241.
xi) Wayne E. Oates, Behind the Mask,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1987), 47-8.
xii) 공격형은 에니어그램의 장 중심의 유형과 흡사하다. 이들은 세상이 하나의 전쟁터로 인식하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 힘의 논리로 이기려고 하고 이기적이 된다. 본능과 충동적인 습관에 지배를 받는다. 「내적여정」 한국에니어그램연구소, 11.
xiii) Karen Horney, Our Inner Conflict (New York: W. W. Norton, 1945), 64-5.
xiv) Oates, 58.
xv) Sue, Wing Sue, Stanley Sue, 246.
xvi) John Townsend, Hiding from Love (Colorado: Nav, 1991), 106-7.
xvii) Horney, 63.
xviii) Paul A. Hauck, Overcoming the Rating Game (Kentucky: Westminster/John Knox, 1991), 18-9.
xix) Oates, 18-9.
xx) Townsend, 106-7.
xxi) Seamands, 104-6.
xxii) Horney, 73-7.
xxiii) 성격장애의 분류에서는 전자를 Schizoid Personality Disorder로 명칭하고 후자를 Avoidant Personality Disorder로 부른다.
xxiv) Oates, 96-8.
xxv) Townsend, 77-8.
xxvi) John Bradshow, Healing The Shame That Binds You, 김홍찬, 고영주 공역「수치심의 치유」(서울: 한국기독교 상담연구소, 2002), 190.
Abstract
Confrontation and False Self
Kim Jun Soo(D.Min.)
Confrontation is a essential part in the counseling process which helps the counselee to face and to own one's problem. However, it is not easy to confront someone who are activating defense mechanism in order to avoid the reality. Understanding one's defense mechanism helps the counselor to find a way to get into the heart of the problem. The false self is the term used to describe layer of defense erected to protect revealing real self. All major schools of therapy speak about the false self. The Jungians call it the persona(the mask). The T.A. people call it the adopted child. It is also called public self contrasted with the private self. The Bible speaks of the Pharisee hypocrite. In Greek hypocrite means an actor, one who is pretending. Jesus rebuked the phony performing self.
This thesis tries to explain biblical understanding of the false self which began when Adam sinned at the Garden. After Adam and Eve sinned against God , being covered with the intense shame and guilt and afraid of rejection and punishment, they reacted to defend themselves. Based on their reactions to avoid facing the problem, this writer developed three defense mechanism. 'Fight' is an attacking response to protect oneself and avoid the real issue. 'Please' is an giving in to other's demand response in order to avoid rejection and, as the result, one fails to reveal the real issue. 'Flight' is a moving away from others response to avoid facing and owning personal problem.
A key for effective confrontation depends on helping counselee to see their own defense mechanism to avoid the real problem. In other words, giving up one's false self and accepting true self is the heart of the counseling confrontation.
Key Words: confrontation, false self, fight response, please response, flight respo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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